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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이 창제되어 선포 된 시기는 세종 25년이고 만리 공 등이 올린 갑자상소는 세종 26년에 있었습니다. 한글 창제를 반대 했다면 창제 이전에 있어야 될 일이 아닌가? 한글 창제시 만리 공은 집현전 부제학으로 직 간접으로 공헌을 하였는데 왜 한글 창제를 반대 하였겠는가? 문제가 되는 갑자상소는 한글을 창제하여 놓고 시행상의 문제점을 제기 한 것입니다. 그 당시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중국의 제도에 따라야 하는 시대 상황을 고려해야 되었고,갑자상소의 요점은 운회언해(韻會諺解)에 있습니다. 세종이 주장하는 한글 전용은 모든 한자어에 중국 발음으로 토 달아 사용 할 것을 주장 한 것인데, 만리 공등이 올린 상소문은 수 백년전에 신라때의 설총이 한자음에 대하여 우리말로 만들어 사용하는 이두문자(지금도 우리가 사용하는)가 있는데 이를 변경함은 백성들이 사용하기에 어려움과 불편함을 상소 한 것입니다. 세종은 자기의 고집대로 한자어의 중국 발음을 시행하였지만 2년만에 실패 하였지요.
왜정 때의 한글 학자 김윤경의 갑자상소의 그릇 된 해석으로 만리 공은 한글창제 반대론자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국내의 유명한 학자님들이 그릇 된 해석임을 강조하고 알렸음에도 지금도 이를 부정하고 있는 언론과 지면이 있음은 참으로 애석한 일입니다.
한글 창제 당시 만리 공은 집현전 부제학으로 세종을 비롯한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한글 창제에 많은 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종 혼자만의 업적으로 알려지고 있음은 다시 한번 돌아 보아야 합니다. 남을 비방하여 자기의 위신을 세우겠다는 '이기주의' 예나 지금이나 이 폐단은 없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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